고귀한 죽음과 고귀하지 않은 죽음
1.
인간의 자격을 논하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그 중에 가장 흔한 이야기는,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라는 말 일 것이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하지만, 현실에서 사람들은 직업에 귀천을 따지며, 더 나아가서 인간의 자격에도 많은 의문을 표한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라는 말은 아이러니하게도 직업과 사람에 귀천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대중적으로 표현되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2.
인간이 살아감에 수 많은 자격과 귀천이 있다고 하지만, 결국 언젠가는 죽는다. 인간은 필멸의 존재니까. 그래서 인간은 아이러니하게도 죽고 나서의 삶과 죽고 나서의 모습에 집착하게 된다. 내가 가지고 태어난 형태는 변하고 사라지나, 다른 형태로 바꾸어서 영원히 남고 싶어하고, 내가 가진 정신이나 가르침을 통해서 후세에 영원히 남길 바란다. 그래서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인간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죽음은 더 잔인하다. 후세에 영원히 남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 하지만, 언젠가는 잊히고 사라진다. 그렇기에 영원히 남으려는 노력보다, 찰나의 순간에 어떤 방식으로 남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3.
인간은 다른 인간을 모두 만족시킬 수 없다. 같은 환경에서 자란 가족들마저도 구성원들의 생각이 각기 다른데, 서로 다른 환경에서 수십년을 살아온 사람들의 생각이 같을거라고 믿는건 너무 허황된 바람이다. 그러므로 아주 뛰어난 학자, 혹은 대단한 업적을 남긴 사람이 아닌, 평범하고 평범한 우리 주변에 어디에나 있는 그네들의 죽음은 영원히 기억될 수 없다. 왜냐면 평범한 그네들의 가치관은 후세에 영속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죽음이라는 표현이 조금 거북하면, 존재의 멈춤정도로 표현해보자. 인간은 존재하기에 기억된다. 또한 기억되기에 존재한다. 인간은 존재하기에 타인의 기억에 존재하고, 타인의 기억에 남아있기에 존재한다. 그리고 존재가 멈추면, 새로운 기억도 멈춘다. 그리고 그건 서서히 흐릿하게 바래질 것이다. 그러므로 영속되는 존재의 흔적보다 찰나의 기억이 더 중요하다.
4.
존재가 멈추더라도, 남아있는 존재의 시간은 계속 흘러간다. 특정 존재의 멈춤이 나의 존재의 멈춤에도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타인의 시간은 멈추더라도 나의 시간은 계속 흘러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본인의 존재가 멈추기 이전에, 주변 정리를 해두는게 남아있는 존재와 본인을 위해서도 좋다고 생각한다.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가족 구성원이 화해할 수 있게 최선의 도움을 주는 것, 그리고 재정적인 문제가 없는 것, 본인이 어디에 있을 지 미리 합의가 되어 있는 것 등과 같이 정리해두어야 할 게 많다. 그리고 이런 걸 모두 정리해 둔 사람은 비로소 고귀한 죽음에 다다를 수 있고, 정리를 하지 않은 사람은 고귀한 죽음에 다다르기 어렵다. 존재의 상실 혹은 멈춤에 대한 감정을 추스르기 이전에, 현실적으로 정리하고 타협을 해야할 일들이 많다면, 그 혼란스러운 과정에서 남아있는 사람들은 그 감정과 기억을 어떻게 정돈할 수 있을 것인가.
5.
내세의 유무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많다. 그리고 아마 영원히 서로의 주장을 증명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남아있는 존재의 시간은 현세에도 분명히 계속 펼쳐져 있다. 그래서 고귀한 사람과 고귀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으나, 고귀한 죽음은 명확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고귀한 죽음은 남아있는 존재들이 온전히 소멸한 존재를 기억속에서 추모할 수 있으면, 그게 바로 고귀한 죽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