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가 없다(2025)

어쩔 수가 없다.
'어쩔 수가 없다'라는 문장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게 다가오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두 가지 의미로 다가온다. 첫 번째, 사회적 혹은 제도적인 이유로 강요받아서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는 것. 두 번째, 개인적인 이유로 이렇게 해야만 내가 생존할 수 있다는 것. 물론 이 두 가지 의미는 사실 같다. '나의 생존을 위해서 이렇게 해야만 한다'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쩔 수가 없다'라는 제목을 본 그 순간부터 나의 감정은 조급하고 긴장되었다.
유만수. 그는 제지회사에서 일하면서 동시에 정원을 가꾸는 취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종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나무를 베어야 하고, 동시에 꽃과 나무를 가꾸는 취미를 가진 양면적인 사람이다. 내가 본 유만수는, 종이를 만들기 위해 나무를 베고, 정원을 관리하기 위해 가지를 다듬고 모양을 만들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정원을 만들기 위해 몰두하는 모습을 미루어보아, '통제하려는 성격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정원을 공들여 가꾸던 사람이 옥상에서 화분을 던지려고 하던 모습은,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행동도 할 수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또한 시체를 마당 한구석에 묻는 모습을 통해 이런 느낌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니까 유만수에게 정원이란, 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용하는 수단일 뿐이다. 정원을 통해 개인이 생각하는 행복한 가정을 투영하고, 나의 통제 욕구를 충족시키며, 필요할 때는 나의 치부를 감출 수 있는 공간. 즉, 정원은 유만수의 모든 욕망이 집약된 공간이다.
치통은 유만수의 인생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유만수가 치통을 참는 이유는 단지 대수롭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사소한 통증이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거슬리는 통증이 되고, 나중에는 고통을 참기 힘들어지는 것처럼. 유만수의 삶을 관통하는 고통, 해고와 가정불화와 같은 것들 역시 그냥 견디고 넘어가다가 점점 통제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이런 성향은 유만수 아들의 일탈, 혹은 범죄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원인을 찾기보다 그저 없던 일로 하자고 주장하는 그의 모습은, 어쩌면 그의 인생에 전반적으로 작용하던 하나의 기준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빛은 이 영화에서 일반적인 의미와 상징과는 조금 다른 용도로, 그리고 조금 더 다양한 용도로 쓰였다. 일반적인 문학에서 빛이란 구원의 상징으로 많이 쓰인다. 어두운 공간에서 빛이 들어오면서 깨달음을 얻고, 내면의 구원을 받으며, 동시에 실생활에도 도움이 되는 매개체로 쓰인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빛은 불편함이었다. 착한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사람이라면 햇빛을 보고 있으면 시야에 제한이 생겨 불편함을 느낀다. 이 작품에서는 사람들이 쉽게 잊고 지나가는 이 부분을 보여주었다. 이 작품에서 햇빛은 악인에게 불편함을 주고, 동시에 악인이 선한 사람처럼 살 수 있는, 혹은 그렇게 보이는 기회를 주기도 한다. 그래서 빛을 받는 사람은 심판받고 있고, 진실을 취조당하는 인물이다.
정원에 시체를 묻고 사과나무를 심는 모습은 이 작품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에덴동산의 사과나무, 그러니까 정원은 유만수의 작은 파라다이스였다. 동시에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세상은 필연적이다'라는 명제가 생각났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는 말을 누가 했는지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나, 어쨌든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던 코나투스를 살아가겠다는 태도를 잘 보여주는 문장이다.
이 문장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 미래가 불확실하더라도 자신의 본성에 따라 행동하는 자유인으로서의 태도를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다. 둘째, 외부 요인에 휘둘리지 않고 현재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이자 삶의 방식이라는 해석 또한 존재한다.
스피노자는 '모든 개체는 인과 관계에 의해서 필연적인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스피노자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완전한 자유를 가진 존재는 신이며, 신에 의해 생겨난 필연 속에서도 무엇을 지켜 낼 것인지에 대한 자유는 인간에게 달려 있다. 그리고 무엇을 지켜 낼 것인지에 대한 자유, 그러니까 인간의 선택은 인간의 욕망에 달려 있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인간의 욕망이란 곧 이성적인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정원'이라는 장소에 '시체'를 묻고 '사과나무'를 심는 것이야 말로, 내가 무엇을 지켜 낼지 선택한 '어쩔 수가 없는' 상황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 작품을 보면서 대중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이유 또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은 전통적인 계층 관계에 대한 갈등을 논하지 않는다. 사용자의 부품으로 살다가 퇴직당한 사람들은 아마 모두 '을'일 것이다. 이 작품은 유만수라는 '을'이 자신의 욕망을 지키기 위해 다른 '을'을 죽인다. 그리고 '을'이 면접을 보는 그 순간에도 햇빛은 '을'을 해체 분석하고 있으며, 또 다른 '을'이 경찰에게 조사받는 상황에서도 햇빛은 '을'을 비춘다. 그렇게 표현된 묘한 불편함과 긴장감은 아마도 시청하고 있는 관객들에게도 불편함을 주었을 것이다.
두 번째로, 아마도 꽤 많은 관객은 제목과 스피노자 철학의 연관성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화면에서 상징적인 무언가가 나오는 것 같은데 이해할 수 없으므로, 사람들은 그 장면들을 '상징적인 장면'으로 바라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장면으로 바라보았을테지.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은 대규모 실직과 같은 사회적 시스템보다, 그런 사회에 적용되는 스피노자의 철학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마도 다수는 그런 상징과 제목, 그리고 내용까지 일관성 있게 적용된 무언가를 찾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일관성 있는 작품이 난해한 작품이 되어 버렸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이야기한 프란시스 베이컨은 자연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자연을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 문장으로 축약했다. 그는 자연을 관찰하고 자연을 이해하여 자연을 지배할 힘이 있어야 인류가 행복하다고 이야기했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 나온 대규모 벌목 장면을 보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프란시스 베이컨이 떠올랐다. 아니 어쩌면, 유만수가 옥상에서 화분을 집어던지려고 했던 그 순간부터 내 마음 한 구석에 프란시스 베이컨이 떠올랐을지도 모른다.
시스템에 의해 희생되는 인간에 대해서는 가엾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나, 인간의 편의를 위해 희생되는 자연에 대해서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시스템에 의해 인간성이 훼손되고, 인간의 편의를 위해 자연이라는 시스템을 훼손하는 현 사회는 어쩌면 모두를 파괴할 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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